[권혜진]품격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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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혜진 박사


 서울숲양현재 대표 

품격경영학습모임 리더 

 

고정관념

품격은 꽤 자주 쓰이는 말입니다. 특히 ‘고품격 OO’이라는 식으로 고급 제품이나 서비스에 대한 수식어로 애용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나 모임, 사회, 국가를 설명하는 말로 편하게 쓰기에는 좀 생각을 요하는 단어입니다. 또 요즘은 품격이라는 말에 아예 거부감부터 느끼는 사람도 간혹 있습니다. 고루함, 권위주의, 실질 합리 편의와는 거리가 먼 형식주의, 거추장스러움, 쓸데없는 허영심과 폼 잡기, 물질적이고 돈이 많이 드는 일 등을 떠올리게 되기 때문인 듯 합니다.

하지만 아마도 상식이 있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다음 중 적어도 한 가지 이상은 공감하지 않을까요. ‘무례한 일을 당해 기분 상한 적이 있다’, ‘기본적인 자기 직분도 다하지 못하는 사람 때문에 눈살 찌푸린 적이 있다’, ‘아무리 격식 파괴가 대세지만 어떤 경우에는 우려된다’, ‘요즘 기초 공중도덕을 무시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고 본다’, ‘우리 국격을 높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교육은 매우 중요하다’, ‘삶에 대한 진지한 태도는 중요하다’. 만약 당신에게 단 하나라도 해당된다면, 품격이야말로 원점에서 들여다볼 가치가 있습니다.

 

‘격’에 걸맞는 ‘품’

품격이란 무슨 뜻일까요? 물질에 대해서가 아니라 사람과 사회에 대해 평할 때 품격이라는 말이 뜻하는 바에 집중해봅니다. ‘품(品)’과 ‘격(格)’을 따로 읽어야 품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품격은 ‘생각과 행동 방식이, 사회적으로 주어졌거나 취득한 격에 걸맞는 정도’를 뜻합니다. ‘품격 있다’는 말은 보여주는 품이 격에 합치한다는 뜻이고, ‘품격이 높다’는 말은 보여주는 품이 그 격에 통상적으로 기대되는 바를 상회한다는 뜻이겠지요. ‘품격이 없다’ 또는 ‘품격이 낮다’는 말은 보여주는 품이 격에 맞지 않거나 격을 무시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품격을 떨어뜨린다’는 말은 품을 망가트려 격을 우습게 만드는 경우를 뜻하겠지요.

 

‘격’에는 귀천이 없다

여기 주목할 점이 있습니다. 격에는 귀천이 없습니다. 다름이 있을 뿐입니다. 마치 언어와 비슷합니다. 언어에는 문법적으로 주격 소유격 목적격 등, 쓰여지는 단어마다 자기 구실이 있습니다. 이를 가지고 어떤 격은 귀하고 어떤 격은 천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단어별로 문장 내 역할이 다를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만인이 천부적으로 그리고 법적으로 동등한 인격체로 대우받아야 한다는 인간관에 뿌리내린 사회라면, 사람마다 사회적으로 주어졌거나 취득한 격은 차별이 아닌 존중 대상입니다. 우선 모든 인간은 ‘인격’으로 대우받아야지 ‘물격’이나 ‘동물격’ 같은 비인격으로 대우받아서는 안됩니다. 만약 누군가를 비인격인마냥 대우한다면 ‘인격 모독’이 됩니다(인격을 ‘신격’화하면 신에 대한 모독이 되겠지요). 전근대사회에서 임금격과 신하격, 주인격과 하인격은 대등한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현대 민주사회에서는 대통령격은 높고 유권자격은 낮다는 인식은 존재해서는 안됩니다. 공직자격이든 국민격이든, 학생격이든 선생격이든 간에, 각자 직분 내지는 ‘OO으로서’ 암묵적 보편적으로 기대되는 바에 충실하기를 요청받을 뿐입니다.

격(格)이라는 글자로 돌아가 보면, 격에는 바로잡는다는 뜻이 있습니다. 사회적 존재인 인간이 부여받았거나 취득한 격에는 자기를 연마하고 조절함으로써 스스로를 ‘격’에 맞게 바로잡아야 한다는 뜻이 깃들어 있습니다.

격이 이런 뜻임을 입증하는 말이 바로 자격(資格)입니다. 자(資)는 재물, 밑천, 비용 등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의미를 확장해보면, 자격이란 ‘특정된 격으로 인정받는 데 필요한 자질(밑천)’을 가리키는 말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격식(格式)이라는 말에도 거부감을 느낄 이유가 없습니다. 사회적으로 부여되었거나 기대되는 ‘격’에 맞는 양식(樣式, 일정한 절차나 기준 혹은 요건을 갖춘 행동 방식이나 일하는 방식)이 격식일 뿐이니까요. 특히 높은 사회적 지위와 책임이 따르는 ‘격’을 가진 사람에게는 엄정한 격식을 따를 의무와 사회적 기대가 따릅니다. 이는 폼을 잡기 위해서가 아니라, 막강한 권한과 영향력을 보유한 자가 이를 함부로 휘두르지 않고 매사 조심하고 책임지도록 규제하기 위해서입니다. 물론 격식은 시대에 맞게 진화되어야겠지요.

이쯤에서 그러면 ‘격차’는 무슨 말인지 궁금해집니다. 격차에서 격은 ‘格’이 아니라 ‘隔’인데, 이는 사이가 떠 있거나 틈이 벌어지거나 거리가 있음을 뜻합니다. 차(差)는 어긋남, 실수, 틀림을 뜻합니다. 품격을 논할 때 격차라는 말을 오해해서 잘못 쓰면 이상해지겠지요? 정상적인 민주주의 법치 사회에서는 출신이나 직업(및 그에 따른 재산)에 따른 차별의식이 없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출신이나 직업이나 직위 같은 불가항력적으로 주어졌거나 후천적으로 얻은 격보다는 독자적이고 고유한 ‘인격’이라는 더 근본적인 격을 우선시해야 합니다. 인격을 최상위 가치로 두고, 그 다음에 사회적으로 주어졌거나 기대되는 격을 따져야 됩니다.

따라서 품격에 격차가 있다는 말을 바르게 하고 싶다면, 격이 아닌 품이라는 문제를 깊이 있게 들여다봐야 합니다. 품에는 귀천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품’에는 귀천이 있다

어떤 사람이 보여주는 행실이나 일한 결과물이 흔히 볼 수 있는 품위 수준보다 낮으면 ‘품위 없다’ 기대 이상으로 높으면 ‘품위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품위(品位)란 있고 없음 문제라기보다는 높고 낮음 문제로 보아야 합니다. 품(品)에는 물건이라는 뜻도 있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성질, 종류, 등급, 차별, 그리고 좋고 나쁨을 따진다는 뜻이 있습니다. 여기서 품평(品評)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위(位)는 자리입니다. ‘품 수준에 따라 매겨지는 자리’가 품위입니다. 그러니 품위는 상대적인 개념이겠지요. 이미 최고 품위를 인정받은 무엇이 있더라도 그보다 더 높은 품위를 향한 도전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존재, 가장 품위가 낮은 무엇이 있더라도 그보다 더 저열한 품위로 추락하는 비극도 얼마든지 일으킬 수 있는 존재가 바로 인간입니다.

만인 인격을 동등하게 존중하는 사회는 격을 가지고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지만 품을 가지고는 그 노력과 성취를 인정하고 차별적으로 보상하며, 그래야 마땅합니다. 품에서 벌어지는 격차는 억지로는 생겨날 수가 없습니다. 이는 자신에게 주어졌거나 지향하는 격에 부합하기 위해 자유롭게 노력하는 개인들이 각자 실력을 연마하고 과업을 수행하는 과정을 거쳐 결과적으로 생겨납니다. 그로 인해 생겨난 격차를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알아차립니다. 혹여 잠깐은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영원히 속일 수는 없습니다.

격에 따른 차별은 없지만 품에 따른 인정과 차별적 보상이 작동하는 사회. 구성원들이 인격체로서 동등하게 존중받으면서 자기 업(혹은 직)을 더 잘 해내려는 동기에 따라 살아가는 사회가 좋은 사회입니다. 지금은 품에 있어서 인정받지 못해 천한(=낮은) 수준이지만 노력으로써 귀한(=높은) 지위까지 갈 수 있는 가능성이 항상 열려 있는 사회가 사람 살기 좋은 사회입니다.

 

품을 연마해 격을 빛내는 사람

똑같이 지저분한 작업장에서 남루한 차림으로 일해도 어떤 사람에게서는 고귀한 기운이 느껴지고 어떤 사람에게서는 천한 기운이 배어나올 수 있습니다. 똑같은 대통령, CEO, 챔피언이라는 지위를 갖고 있어도 어떤 사람은 시대를 초월해 존경받고 어떤 사람은 추락해 잊혀집니다. 이런 사례는 역사 속에 숱하고, 지금도 우리 주변에 널려 있습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결국 격이 아닌 품에 따라 평가되어 왔습니다.

여기까지 풀어본 품격론은 우리 사회에서 통용되어 온 바와는 조금 다른 이야기였습니다. 누군가의 행실에 대해 막연히 격 또는 품격이 있고 없다는 정도로 이야기하고 넘어간다고 해서 잘못은 아닙니다. 다만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조금 더 정교하게 들여다보면 얻을 수 있는 통찰이 많습니다. 그래서 다음 글에서도 품격을 논할 때는 품과 격을 나누어 점검하겠습니다. 격에 있어서는 인격적 동등성 인식과 사회적 격에 대한 분별을 중시하려 합니다. 품에 있어서는 품위를 회복하거나 더 나은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학습과 연구 방법 그리고 실행 방안에 초점을 맞추려고 합니다.

품을 연마해 격을 빛낸다는 사고방식과 태도. 다음 회차부터 하나씩 알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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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

이 글은 세종평생학습원에서 발행하는 무료 뉴스레터 <세종이야기> 제174호에 게재되었습니다(세종이야기를 더 알아보려면 → allthatsejong.com → 자료실 → 리더십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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